May, Rollo. (2013). 권력과 거짓 순수. 신장근(옮김). 서울 : 문예출판사. (원서 출판 1972, 재간 1998)
꽂혀서 샀는데 좋은 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어쨌든 재밌다는 느낌이 드는 부분들은 있었다. 정확하다기보다는 약간의 영감을 준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pp.17~18우리가 대지에 감사하고 동료에게 지지받는 것은 우리가 가진 권력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동료와 협력해서 그 권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p.34 "... 많은 경찰 폭력이 유아기 문제보다는 경찰 업무 적응 과정에서 비롯되는 반면, 사실 그 결과는 다른 사람과 거의 비슷하다"라고 톡은 말한다.
p.74 여기서 사람들은 영화 <이지 라이더(Easy Rider)>에 나오는 피터 폰다(Peter Fonda)가 갈지 않은 딱딱하고 메마른 땅에 밀을 뿌리며 "밀이 자랄 거야" 하고 말한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모순에 빠졌다.
p.116 이런 메시지는 무력감에 압도당한 사람이 늘어놓는 흔한 변명이다. 자신이 힘이 없는 것이 분명하기에 영향력 있는 다른 누군가가 사태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p.116 어느 누구도 죽기 전에는 완벽하게 무능력하다고 볼 수 없다. 사람이 분명하게 자신을 주장할 수 없다면 은밀하게 주장할 것이다.
p.144 우리가 흔히 '질투'라고 부르는 상태는 분명히 정상적인 돌봄을 훨씬 넘어선다.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가에 비례해서 일어나는 소유욕이다. 즉 개인이 다른 사람을 상실하고 느끼는 위협의 정도가 질투를 느끼는 정도다. 그 개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되찾을 힘이 없고, 완전히 버림받은 것같이 느끼는 상황에서 질투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p.145 권력과 사랑의 경계선은 서로 겹쳐진다.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영향받고 싶고, 사랑받는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 사랑과 권력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은 연인들이나 부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 자기주장, 자기긍정, 심지어 공격성도 때때로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애정 관계를 발달시키는 건강한 요소다.
p.147 살아있는 사람에게 권력은 이론이 아니라, 그가 직면하고 사용하며 즐기고 하루에도 몇백 번 싸워야 하는, 항상 존재하는 현실이다.
p.153 아이가 자신의 성장하는 개성을 보호하고 주장하려면 모든 공격적 잠재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169 나지만 나중에 그는 분노를 건설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분노는 나를 자율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부모님을 떠나 홀로 서게 해주는 역동입니다. 분노하지 않는다면, 무력한 겁니다."
p.170 올리버가 보여주듯 많은 사람이 저지르는 오류는 자기긍정을 무시한 채 곧바로 무기력 상태에서 공격성과 폭력으로 건너뛰는 것이다. 항상 무기력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될 때 느끼는 도취된 감정은 중독적일 수 있다.
p.175 인간 의식의 반성적 특성은 왜 동물 행동 연구가 인간의 공격성에 대해서는 단지 주변적인 것만 조명하는지 설명해준다. 인간은 한없이 더 잔혹해질 수 있으며, 그 잔혹함이 주는 가학적 즐거움을 위해 동물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특권'을 파괴할 수 있다. 이 모든 일들이 인간의 본성과 존재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따라서 이 선택이 얼마나 제한될 수 있나와 상관없이 사람은 자기 성장에 참여하고 온 힘을 다해 이 경향이나 저 경향을 지지할 때 자기(self)가 된다. 자기는 결코 저절로 발달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가 알고, 긍정하며, 주장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자기가 된다.
pp.177~178 자기주장에서 호기심을 끄는 한 측면은, 사람이 자기주장을 연습할 반대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시 자기주장이 병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한 권력의 건설적 측면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것을 비교적 어린 2~4세 아이에게서 관찰할 수 있다. 아이들은 자신이 어디까지 나가야 부모가 반대하는지 보려고 '한계를 시험할'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거역하기 위해 부모를 거역하며, 다른 사람에게 '싫어'하고 말하기 위해 부모에게 '싫어'하고 말할 것이다.
p.179 존재는 자신의 권력을 실현하는 과정에서만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존재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아는 것은 그만두고, 존재를 인식하기나 할 수 있을까? 반대를 극복하는 상황에서 권력은 실현된다.
p.183 공격성 자체는 그 목적과 동기가 무엇이든, 또 그것이 정당화되는 때와 그렇지 않는 때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나 자신이 신봉하는 사상을 위해 권력이나 특권 또는 다른 사람의 지위를 빼앗으려는 시도로 이루어진다.
p.202 단언이나 주장과 달리, 공격성은 효과적 행동을 일으키려면 더 큰 힘이 필요할 정도로 반대가 심하고 무관심과 타성이 강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현상을 유지하려는 것은 모든 사회의 본질이다. 때때로 공격성이 폭력으로 변하는 것은 군중이 맹목적으로 분노하기 때문만 아니라, '법과 질서'의 편에 선 경찰과 군대의 행동 때문이기도 하다.
pp.203~204 폭력이 좀처럼 완화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폭력에 내재된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며 황홀케 하는 요소를 단호히 간과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을 폭력을 이해하려 하면서도 폭력이란 주제를 빼놓는 경향이 있다. 폭력에 반대하며 장광설을 늘어놓는 한 하원의원은 어린 시절 자신이 소방차를 따라 달리고 투우 사진에 매료되었으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고 현장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과 공포의 기묘한 조화에 푹 빠졌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하다. 우리는 몸으로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된 '폭력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부인한다. 우리는 폭력에 대한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게 억압해서 은밀하게 폭력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은밀한 사랑'의 실체를 인정할 경우 직면해야 할 더 깊은 정서적 암시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인간적 방어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우리는 서둘러서 적을 악마의 이미지로 바꿔버린다. 그러면 맞서 싸우는 상대가 악마이기 때문에 스스로 전쟁이 제기하는 온갖 골치 아픈 심리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묻지 않고 전쟁터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우리가 죽이는 적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직면할 필요가 없어진다.
pp.209~210 '폭력이 악하다면', 다른 많은 고전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 폭력이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이 소설에는 인간의 한 욕구를 충족시키며 전적으로 '나쁠' 수 없는 폭력에 관한 무엇인가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p.210 죽음은 우리가 견뎌야 하는 유일한 폭력 또는 폭행이 아니다. 삶은 다른 폭력 행동으로 가득 차 있다. 출생, 부모와 자녀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다툼, 사랑하는 사람과 가슴 아픈 이별은 모두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폭력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경험이다. 어떤 인생도 사는 동안 폭력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p.216 전쟁은 왜 매혹스러울까? 첫째,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하는 극단적 상황이 주는 매력 때문이다. 이것은 정도가 다르긴 해도, 올리버가 시위 행진이 '인간적 욕망 이상으로' 자신을 사로잡았다고 했을 때 언급했던 요소다. 전쟁이 매혹스러운 두 번째 이유는 개인의 책임감과 죄책감을 면제해주는 거대 조직의 일원이 될 때 누리는 강화 효과 때문이다. 전쟁을 도덕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선전포고는 도덕적 성명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병사가 도덕적 책임을 부대에 위탁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전쟁 기계를 비판할 때 자주 인용된다.
p.226 반응 지연 능력은 문명이 준 선물이자 짐이다. 우리는 그 사건을 의식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떤 것이 최상의 반응일지 결정한다. 바로 이런 반응 지연 능력 때문에 문화가 가능하지만 동시에 신경증이 발생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신경증 환자는 새로 알게 된 사람을 상대로 어린 시절에 결코 해결하지 못했던 오래된 싸움을 싸우는 데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p.227 따라서 한 사람이 자기 주변의 세계를 보고 해석하는 방식이 그가 폭력을 휘두를지 말지를 결정한다. 이 해석 방식이 자기 차 안에서 앉아 있다가 경찰이 다가와 신분증을 요구하면 격분하는 흑인 남성에게 싸울 마음을 주는 것이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흑인 남성에게 굴욕을 준 경찰의 '강한 남성성(machoismo)'의 저변에도 이 해석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해석이 병적이든, 상상이나 망상이든, 순전히 거짓이든 해석은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해석이다. 편집증 환자는 다른 사람이 마력을 써서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들에게 총을 쏜다. 자신을 지키려고 쏜다. 살인을 저지른 편집증 환자가 내린 상징적 해석의 참뜻을 살펴보고 잠시나마 그가 보는 대로 세상을 볼 수 없는 한 그를 '편집증 환자'라고 부르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p.231 폭력은 자기 힘을 증명하기 자기 가치를 확증하기 위해서 자기 권력을 체계화하는 것이다. 폭력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며, 모든 일을 저지르는 것이고, 모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폭력은 합리성을 빠뜨린 채로 다른 요소를 내면에서 통합하는 것이다.
pp.236~237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인간 이하의 수준에서 살 때 다소의 폭력이 삶에 활기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는 무수히 많은 상황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 해당되는 사람에는 지나치게 수줍어하는 사람, 대인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의심 많은 사람, 깊이 사랑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 자신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경험에서 스스로 격리시키는 겁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 목록은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약간의 폭력이 있으면 결핍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성취감을 느끼려면 합리성을 뛰어넘어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며, 모든 일을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평생 온순했던 한 여인이 갑자기 화를 내면서 길고 신랄한 비난을 늘어놓을 때, 우리는 웃으면서 말없이 환호한다.
p.253 일부 비폭력적인 사람들이나 평화주의자 또는 꽃의 아이들처럼 어른이 순수를 유지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순수에 매혹되고 양심에 자극받는 동시에 나도 모르게 공감하며 괴로워한다. 우리는 이 순수한 사람들에게 착취당한다고 어렴풋이 느낀다. 이 순수한 사람들은 세상이란 육체의 가시다. 그들은 경찰과 정부 당국이란 '법과 질서'를 무효로 만들겠다고 위협한다. 살해되기 전날 주방위군 병사의 총구에 꽃을 꽂은 앨리슨 크라우스의 상징적 행동은 총이 지닌 권위에 대한 모든 신념을 흔들어놓는 도전이었다. 이렇게 순수는 우리가 아는 세상을 전복하겠다고 위협한다. 진정한 순수는 많은 사람을 양가감정 상태에 빠뜨리는 선량함이다. ... 사람들이 선한 사람을 무조건 사랑한다는 순진한 믿음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고 나면 그 오해가 풀리겠지만, 가장 오래된 망상 가운데 하나다.
p.255 하지만 순간적인 완력 사용에 따라 우리의 판단이나 윤리가 달라질 수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자기 절제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윤리적 내용이 없는 율법주의에 빠질 것이다. 이것이 종교적 율법주의든 컴퓨터 지향적인 율법주의든 간에 모든 경직된 율법주의가 저지르는 오류다. 그리고 우리의 주목적은 그런 경직성을 피하는 것이다.
p.259 사람은 세계를 체험할 능력을 갖는 동시에 그 체험에 대한 자신의 민감성을 차단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p.261 우리는 도시 문 밖에서 스핑크스에게 인신 희생 제사를 바치거나, 죄책감과 책임감을 우리 내면의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책임감과 함께 죄책감을 수용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이 도시 밖에 있는 스핑크스에게 죄책감을 투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p.266 용과 스핑크스가 그 자체로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오직 여러분이 그 둘을 투사하느냐, 아니면 직면하고 통합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용과 스핑크스를 인정하는 것은 같은 사람 안에 있는 악과 선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할 능력이 커질수록 악을 행할 가능성도 커진다. 우리가 추구하는 선은 선악 양쪽 모두에 대한 증가된 민감성, 예리해진 인식, 고조된 의식이다.
p.272 '아니요'라 말할 수 없다면, '예'란 대답은 의미가 없다. 의식은 개인 대항의지(counterwill)의 훈련을 요구한다. 대항의지는 모든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데, 사람은 갈등을 겪으면서, 자신이 가지고도 모르는 권력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 권력을 요구하며, 대항의지를 일으키고 고취하며 발전시킨다.
p.274 한 문명 안에 관례만 있고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더 투입되는 것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 기성 관습만 있다면, 그 문명은 수동성과 무관심 가운데 침체되어버린다.
p.277 반역자도 사회가 필요하다. 반역자의 언어와 생각,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방법 등이 모두 그가 반대하는 그 문화에서 나온다. 반역자는 자신을 낳은 문화를 비판하고, 그 문화를 개혁하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손을 잡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는 자신이 반대하는 바로 그 문화의 일원이다. 문명을 그 예언자들을 죽이는 배은망덕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또한 반역자의 행동에 대한 감사나 배은망덕의 모든 질문이 불합리하다는 것도 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 관계를 변증법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것은 각각의 극이 다른 극 덕분에 존재하는 변증법적 상호관계다. 즉 한쪽이 변하게 되면 다른 쪽도 변한다.
pp.277~278 사회는 개인을 억압한다. 그것이 본질이다. 이 점을 지적하면서, 한나 아렌트는 사람들이 너무나 자주 사회라는 집단이 다르게 행동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한다는 데 놀라움을 표현했다. 레이크(Reich)부터 프롬(Fromm)에 이르는 현대 작가들은 우리가 지금 이 모양인 것은 사회의 잘못 때문이라는 뜻을 함축하는 '관료적', '불가항력', '거대 기술 관료적' 등의 표현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줄곧 분개해서 사회에 대해 말했다. 한편으로 이러한 비판은 우리가 우리를 올바르게 훈련시키는 사회를 세우면 모두가 건강해지리라는 기대인 이상주의(utopianism)에서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비판은 부모들이 자기보다 더 키가 크지 않고, 어떤 면에서 현재의 자기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럴듯한 말로 부모를 속이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 모든 것은 사회에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는 한편으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반역자는 이중인격자다. 반역자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자신을 양육했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켰으며, 자신의 잠재력을 계발시키기 위한 안전을 제공했음을 알지만, 사회의 제약들 때문에 상심하며 숨 막힌다고 느낀다.
p.287 현대 예술가들은 그들이 대화에서 밝히는 것처럼, 이 어려움을 예민하게 느낀다. 몇 년 전 로버트 머더웰은, 이 시대는 예술가가 자신만의 공동체를 창조해야 하는 첫 번째 세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어울릴 만한 의미 있는 사회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공동체가 없다. 사회는 예술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겉치레일 뿐이고, 실제로 현대사회는 예술가를 사고판다. 돈을 가진 개인은 한 예술가의 작품을 모두 사들여서 큰 구덩이에 파묻을 수 있다.
p.291 적이 전멸될 경우 반역자와 그 전멸에서 살아남은 나머지 사람들은 고유성, 독창성, 그리고 적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지녔고 함께 나눌 수 있었던 통찰 능력을 박탈당한다. 우리가 적들이 죽기를 바란다면 인간 공동체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적과 대화할 기회가 없어지면 우리는 더 불행해진다. 적이 가진 좋은 생각과 적이 주는 제한을 함께 잃어버릴 것이다.
pp.292~293 자기실현 같은 개인 목표에도 동일한 한계가 있다. 인간 잠재력 운동(human potential movement)은 미국에서 널리 유행하는 순수의 형식을 물려받았다. 즉 우리는 점점 더 도덕적으로 완벽해진다는 것이다. 항상 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도덕적 거인이 아니라 까다로운 사람이 된다. 오히려 우리는 선악 양쪽 모두에 더 민감해지도록 성장해야 한다. 도덕적 생활은 선악의 변증법이다. 특히 폭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각자에게 내재한 선악을 인식해야 한다.
p.293 우리 모두 안에 선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을 도덕적으로 오만하지 못하게 해준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바로 이 한계를 깨달을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p.294 폭력을 누그러뜨리려면, 반드시 그 문제와 대등한 수준에서 그 폭력을 다뤄야 한다. 왜 폭력을 줄이기 위한 제안들은 대부분 폭력이란 문제 자체와 비교해볼 때 피상적인 느낌을 주는 걸까?
p.295 매스커뮤니케이션은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치켜든다. 웨덤 박사와 같이 주장하는 사람은 그 거울을 깨서 우리가 자신의 파괴성을 모르고 행복한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고 할까?
p.296 폭력은 한 증상이다. 폭력이란 증상을 낳는 그 질병은 무기력, 무의미, 불의같이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간단히 말해서, 그 질병은 내가 인간이 아니며 세상에는 내 집이 없다는 확신이다. 나는 폭력도 그것을 촉발할 어떤 징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폭력을 낳는 그 질병을 간단하게 무능력(impotence)이라고 불러왔다. 이 무능력은 자신이 고통당하거나 죽으면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과 결합된 절망이다. 그 질병의 핵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능력을 다룰 필요가 있다. 이상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관료주의사회의 어떤 영역에 있든지 모든 사람이 자신도 가치 있고, 친구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인간 취급 못 받는 사람으로 무관심의 똥더미 위에 내던져지지는 않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권력을 나누고 분배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pp.296~297 권력이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생득권이다. 권력을 자존감의 근원이자,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사람이라는 확신의 근원이다. 그가 흑인이든 여성이든 아니면 죄수나 정신병 환자이든, 혹은 베트남에서의 섬멸을 직시하거나 인구과잉과 오염에 직면하고 있는 학생이든 간에 문제는 대략 동일한 것이다. 즉 개인에게 자신이 중요하게 여김을 받을 것이며, '관심을 받게 될' 소중한 기능을 맡았다고 느끼게 하는 문제다. 사람이 개인이 될 외적 기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0년간의 발견은 점점 더 인간을 해방시켰다. 나는 오히려 한 개인과 동료들이 그 개인을 심리적이고 영적으로 평가한 결과는 유의성(significance)에 대한 내적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pp.297~298 오클라호마대학에서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에 따르면, 오클라호마대학에서폭력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학생들에게 대학 재건에서 없어선 안 될 역할을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온정주의 때문이 아니라 확실하게 할당된 권력이었다. 학교 당국은 학생들이 내린 판단은 재건이 효과를 보려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처럼 존중하고, 기대했으며, 활용했다. 그것은 참여자들(말하자면 학생들)의 발달 단계에 따른 책임 있는 권력이었다. 책임은 권력에 비례한다. 위협이 가해졌을 때, 그 위협은 폭력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왜 오클라호마대학생들이 폭력적으로 행동해야 했겠는가? 학생들은 무능력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대학 관리에 대한 발언권이 있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됐다.
pp.299~300 소통하려면 권력이 필요하다.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집단에 저항하며 자기 의견을 말하거나, 친구에게 심각하고 감정을 상하게 하는 진실을 솔직하게 말하려면 자기긍정, 자기주장, 그리고 때로는 심지어 공격성도 필요하다. 이 점은 지나치게 자명해서 흔히 간과되곤 한다. 그래서 부버는 '강력하게 반대'하라고 간청했다. 심리 치료 경험으로 나는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은 분노하거나 화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가장 깊은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간결하고 진실하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과 대등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가장 솔직하게 의사를 전달한다. 폭력은 그 자체로 소통이다. 빌리 버드라는 인물로 묘사된 프롤레타리아 계급 구성원들의 경우 특히 그렇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말로 소통할 수 없다. 폭력을 써서 공격한다. 아무리 미숙하거나 거칠지라도 폭력은 여전히 어떤 상황에서는 적절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필요한 하나의 언어다.
pp.300~301 빌리버드가 전함 장교들에게 재판받으려고 선장실에 서 있으면서 "내가 말할 수 있었다면 클래가트를 죽이지 않았을 텐데" 하고 했을 때, 그가 말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빌리가 찾을 수 없었던 이 '말'은 무엇인가? 분명히 단지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두려움을 피하려고 공백을 채우는 의미 없는 지껄임이 될 것이다. 멜빌은 빌리의 말을 통해 폭력 충동을 이겨내고 서로를 결속시키는 그런 종류의 소통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종류의 말은 사람들을 융화시키고 회복시켜준다.
p.301 심리치료에서 우리는 결혼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가 경험하는 문제는 그 부부가 소통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로 대략 측정할 수 있음을 안다. 상대가 말하려는 내용(혹은 말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관계가 소원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상대방의 주파수에 전혀 맞추지 않거나, 맞추고 싶지 않은 것이다.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같은 문제의 한 증상이다. 이 증상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전달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자 전체적인 자기를 차단하는 것이다. 적대감이 증가함에 따라 투사 역시 증가한다. 많은 주장이 일어나고 거리가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은 적대감이 증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머지않아 폭력을 쓰게 된다. 심리 치료는 같은 주파수로 말하도록 그 과정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혼을 결심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부부는 그 결정을 함께 내렸고 그 과정은 훨씬 더 많은 동일성을 담은 것이다.
p.302 당신이 말하는 내용이 상대가 들을만한 가치가 있으려면, 당신은 상대에게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성욕을 풀어줄 대상이나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착취당해야 할 존재로서, 아니면 다른 어떤 식으로든 객체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대하면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통이 공동체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서 전에 결여되었던 이해와 친밀감, 상호존중에 이르게 한다.
p.303 공동체 안에는 적이 필요하다. 적은 내가 방심하지 않고 생기 넘치게 해준다. 나는 그의 비판이 필요하다. 일찍이 레싱(Lessing)은 "가장 악한 원수에게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다면,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 20마일이라도 걸을 것이다"하고 말했다. 원수들에게 명확히 배우는 것 외에도 우리는 정서적으로 그 원수들이 필요하다. 원수들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적 경제(psychic economy)가 잘 유지될 수 없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원수가 죽거나 무능해질 때 유례없는 공허감을 느낀다고 한다. 우리에게 친구가 필요하듯 원수도 필요하다.
p.304 프리실라는 또한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구별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한쪽은 다른 쪽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잘 안다면 그에게 동정심을 갖기 쉬울 테고, 동정심을 갖게 되기 때문에 그를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말할 때,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며 마음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형성되도록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이유다. 그 경향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차단해버리려고 귀는 아니더라도 마음을 닫는 것이다.
pp.304~305 권력발달은 의사소통에서 그렇듯이, 동정심을 갖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대인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동정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을 빼앗긴 상태에서 심리 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프리실라는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쓸 정도로 충분히 적응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이 동정심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약간의 안정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쓸 수 있는 어느 정도 권력이 있어야 한다. 자존감과 자기긍정이 결여되면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기 위해 무엇인가 남겨두는 것이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으려면 반드시 그전에 '펌프에 마중물로 부을'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p.308 동정심은 권력과 사랑 양쪽을 모두 아우르는 인본주의의 기초다. 동정심은 폭력을 반대한다. 폭력은 반대자에게 적대적 이미지를 투사시키지만, 동정심은 자기 속에 있는 그런 악마적인 충동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동정심은 누군가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자비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원수들을 동정하는 것은 하나의 인간적 가능성이다.
p.311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이란 말은 익숙한 용어이며,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이 '그 잠재력을 성취하는' 데 적응됐다. 하지만 잠재력이 그 한계들 안에서 경험되지 않으면 결코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쉽다. 그 오류는 마치 잠재력에 아무런 한계가 없으며 인생이 끊임없이 '앞을 향해, 그리고 위를 향해' 나갈 것처럼 잠재력을 다루는 데 있다. 매일 조금씩 더 진보하면 '선하게' 될 수 있다는 망상은 과학기술에서 밀조된 후 그것이 들어맞지 않는 윤리학에서 신조가 된 교리다. 이것은 과학기술의 방식이다. 하지만 윤리학과 미학, 그리고 정신에 대한 다른 주제에서 그런 의미의 진보라는 용어는 설 자리가 없다. 현대인은 소크라테스나 그리스인들보다 더 윤리적이지 않다. 우리가 달리 짓는다고 해도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아름답게 짓지 못한다.
p.312 인간의 실존이 기쁨인 동시에 슬픔이라는 인식은 자기가 의도했던 결과에 책임을 지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때때로 나의 의도는 악하게-내 안에 있는 용이나 스핑크스가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때때로 드러날 것이다-되겠지만,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기보다는 그것이 내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p.314 은총이라는 요소가 빠질 때 원수 사랑의 계명은 도덕적 계명이 될 것이다. 이 경우 원수 사랑은 개인이 자기 성격을 고쳐서, 즉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 결과로 성취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때 우리는 매우 다른 무엇인가를 갖게 된다. 바로 지나치게 단순화한, 윤리적 가식의 위선적 형식이다. 이것은 개인의 현실 인식 차단에 근거하고, 개인이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실제로 가치 있는 행동을 못하게 하는 도덕적 가치에 이르게 한다.
pp.315~316 그때 우리는 흠잡을 데 없는 성격의 사람이 공장을 경영하면서 직원 몇천 명을 터무니없이 착취하는 이상한 상황을 경험했다.
p.316 여기에 빠진 것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것, 즉 흑인이나 죄수, 빈민처럼 권력을 빼앗긴 사람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당연히 자기밖에 모르는 중산층이나 상류층 사람들과 대조되는 무산자 계급의 연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심은 방대한 추종자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동포주의, 동지애를 강조한 것이 바로 그것에 목말라 하던 세계의 마음과 감정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p.317 윤리적으로 선의 사다리에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 하는 것은 무엇을 버렸는가로 판단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선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자기 성격에 대한 독선적 오만이다. 악 역시 선을 행할 능력과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무미건조하고 진부하며 활기 없고 냉담해진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매일 선악 모두에 좀 더 민감해진다. 그리고 이 변증법은 우리의 창조성에 필수적이다.
p.318~319 사람이 자신에게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정적 측면이 있으며, 그 악마적 측면이 선과 악 모두의 잠재력으로 작용하고 있고, 자신은 그 부정적 측면을 부인할 수 없을뿐더러 그 측면 없이 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큰 혜택이다. 자신이 성취한 많은 부분이 이 악마적 충동이 일으킨 갈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도 유익하다. 이것은 삶이 선과 악의 혼합물이고, 순수한 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악이 잠재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악이 공존하는 속에서도 선을 이루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그다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 사람은 상담가로서 내담자를 상담할 때나 이 책의 내용들을 전개할 때 정신분석이라는 도구를 많이 사용하는 듯하는데 나는 정신분석이라는 걸 신뢰하지 않는다.
2 권력, 권력감, 무기력, 폭력, 공격성 같은 단어들은 모두 엄밀한 정의가 필요한 단어들. 정의가 애매해져버리면 논지 전개에서도 삐끗하기 마련이다. 물론 권력이나 공격성 같은 단어는 정의하기가 애매하고 까다롭기는 하다. 하지만 적어도 명확하게 정의를 해두어야 혼선을 피할 수 있다.
3 폭력 상황에서 그 원인이 단일한 경우는 잘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모든 폭력의 원인이 무기력일 수는 없다. 오히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의 힘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폭력 행위를 한다는 주장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4 무기력 논의와는 다른 논의이지만, 분명히 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게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폭력을 사용하고 난 뒤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후회를 덜 하거나(혹은 안 하거나), 폭력을 당한 사람에 대한 죄책감을 덜 느끼도록 (혹은 느끼지 못하도록) 태어난 사람 역시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 행위를 남들보다 자제할 수 없고, 교정하기 힘든, 따라서 폭력적인 성향을 타고났다고 표현할 수 있을만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확실히 있다고 생각한다.
5 권력과 의미감 같은 주제를 이 책에서 다루듯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은 경험적이지 않고 사변적이다. 물론 저자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사례들을 가져와 근거로 들긴했지만,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경험적 설명방식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사회과학이라기보다는 인문학에 가깝고, 경험과학이라 부를 만한 속성이 거의 없는 책이라 생각한다.
고로, 이 책을 읽기 전에 사회과학적인 글을 기대한다면 반드시 실망하겠지만, 조금 무거운 수필 정도로 생각하고 읽는다면 나름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비판하긴 했지만 흥미롭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1 누구에게나 권력에 대한 감각이 중요할 수 있다. (이걸 저자가 의미감이라고 부른 것과 연관시키는 건 또 다른 문제이지만.) 그리고 사회적 권력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은 꽤 명백하게 밝혀질 수 있는 부분일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꽤 연구가 많을 듯.
2 거짓 순수, 무기력감에 빠진 사람이 권력을 쥐게 될 때의 딜레마. - 표현이 이래서 그렇지 발달 과제나 역할 갈등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3 최소한의 말할 자유, 논쟁할 자유를 빼앗겼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
4 한국 사회에도 비슷한 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인터넷 댓글 창 같은 데에서 많이 보이는) 권력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어떤 문화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와 함께 따라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권력이란 게 존재해서 사람들을 구원할 거라는 순진한 믿음 같은 것.
어떤 인간의 집단이 있을 때, 그 집단의 행동 방향의 결정을 위해선, 그 권력 체계가 공평하든, 집중되어 있든, 아무튼 간에 권력이라고 할 만한 게 분명히 필요하다.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인간 집단은 없을 것이다. 이 때, 그 집단의 구성원으로 남아있고 싶은 어떤 개인이, 집단에서 발생하는 권력이라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 권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권력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무엇에 대해 그게 좋다고 당위를 주장하기야 쉽지만 그건 그거대로 또다른 순진한 생각이 아니겠는가.